Page 18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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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권율장군이 독산성에 머문 기간과 군사 수 및 상대한 적장,

                    그리고 전투 기간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의 왜군을 조선에 보내며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왜군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한성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5월 정암진전
               투, 7월 이치전투, 10월 진주대첩 등으로 번번이 좌절되고, 해상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연전연

               패 하면서 호남과 해로를 통하여 한양에 진출한다는 본래의 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독산성이 군사적 거점으로 이용된 것은 전쟁 발발 초기에 전라, 경상, 충청의 3도 근왕병에
               의해서였다. 왜군은 한양으로 진격할 때 용인으로 거쳐 갔으므로 오산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

               었지만, 그러나 거점이 용인지역인지라 항시 피습대상지역으로 수원은 여러번 약탈을 당하였
               다. 이러한 이유로 독산성을 중심으로 삼남지역의 근왕병이 주둔하거나 북상하는 주요한 거점
               으로 삼게 되었다.

                 첫 번째로 수원성에 도착한 것은 1592년(선조25년) 6월 3일에 전라감사 이광의 3도 근왕병
               들이었다. 6월 5일과 6일에 양일간에 걸쳐 전개된 용인전투에서 근왕병 5만 명이 왜군 2천여
               명에게 대패함으로서 삼남근왕병은 흩어지게 되고 조야가 모두 실망하고, 왜군의 살육과 약탈

               은 수원 인근까지 자행되고 있었다.
                 용인전투 대패 이후 1592년(선조25년) 6월 23일에는 새로이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3000명

               의 군사와 함께 북상하여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수원부사 출신이기도 한 김천일은 곧 강화도
               로 들어갔으며, 그 대신에 종사관 송제민을 독산성에 남겨두었다.
                 9월 조정은 홍계남을 수원판관에, 9월 21일에 조경을 수원부사로 임명하였고, 이들은 훗날

               휘하 병력을 이끌고 권율 휘하로 들어간다.
                 한편 전라순찰사 권율은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방어사 황진에게 이치를 지키게 하고,

               도내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1592년 9월 22일에 권율은 휘하 장수들에
               게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가 되어 버렸지만, 도성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도성
               을 수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진을 하자 각 고을 수령과 의승장 처영

               등이 함께 따랐다.
                 권율 휘하에는 수원부사로 조방장에 임명된 조경, 의병장 변사정, 의승장 처영, 전라도 병사
               선거이, 초모사 변이중, 의병장 임희진 등으로 이루어졌고, 10월에는 직산에 도착하여 양남도

               체찰사 정철을 만났다. 정철의 명령으로 북진을 멈추고 관내를 지키고 있었다.
                 이 상황을 행재소에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차고 있던 검을 하사하며 “모든 장수 중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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