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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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이에 권율은 북상하여 1592년 12월
에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더 이상 북상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백광언을 따라
북상하여 용인전투에서 무리한 공격을 하여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한성에 주둔하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
진하여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도성에 주둔한 왜군을 독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하여 왔지만 권율은 매복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지켜나갔다. 지
형 조건을 자세하게 살핀 적장은 성안에는 물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지어 산 위에 있는 권율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 사실 독산성엔 물이 부족하여 극심
한 식수난을 겪고 있었다.
권율은 즉시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 흰쌀을 말 위로 쏟아 붓게 하
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적장의 눈에는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독산성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차에,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왜군의 후방
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조급해진 왜병들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한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
다.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과천을 거쳐 한양을 퇴각하는데, 이 때를 놓치
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는데 봉담면의 ‘삼천병마골전투’는 이때
의 전승지인 것이다.
권율은 1593년 1월 중순까지 독산성에 머물다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그 후 권율은 1593년
(선조 26년) 2월 12일 하루 만에 행주대첩에서도 이겨 서울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
다. 이 독산성 전투가 밑받침이 되어 행주산성에서 하루 만에 왜적을 섬멸하게 된 것이다. 행
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불린다.
* 권율이 독산성에 머문 기간 : 1592년 12월에서 1593년 1월 중순.
* 권율이 독산성에 주둔 시킨 군사 수 : 1만여 명.
* 권율이 대적한 적장은 : 우키다 히데이에가 보낸 부하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잘못 알고 있는 것
임. 권율이 독산성에 주둔한 기간에는 오산에 온 적이 없음.)
* 독산성전투 기간 : 5일임.(5개월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