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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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천烏山川(오산시  지경  내에  속한  오산천)





                    오산천은  옛  용인시  구성면  동백리,  중리의  보개산(현재  동백지구  향린동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인시  기흥구  기흥동에  신갈천(종전의  오산천  중에서

                  2017년  4월  용인구간  10.35km를  지방하천  신갈천으로  명칭  변경)이루고  남쪽으로
                  꺽여  흘러  신갈저수지를  이룬다.  이  물이  계속  남쪽으로  흘러  화성시  동탄의  서쪽
                  을  거쳐  오산시의  오산동,  누읍동을  거쳐  계속  남류하여  평택시  진위면과  서탄면의
                  경계를  이루고  진위천과  합류하는  지점을  종점으로  하는  국가하천이다.  총  길이는
                  15.39km,  유로연장은  29.5km,  유역면적은  152.8㎢,  기점의  하폭은  79m,  종점의
                  하폭은  277m이다.  오산천의  동쪽에는  넓은  충적퇴적에  의하여  생긴  넓은  들이  발

                  달되어  곡창  지대를  이루었는데  오늘날의  오산시  운암들로서  곡창지대를  이루었으
                  나  지금은  택지로  개발되어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오산천은  오산의  젖줄이며  오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오산천은  오산  발전의  상징
                  이며  오산의  대외적인  이미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갖는  대표성을  갖고  있다.  특

                  히  오늘날  오산천은  오산시의  중심을  관통하면서  시가지  형성과  미래의  명품도시로
                  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오산천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왔는데,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은
                  문헌에  나타난  것이다.  <오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고문헌을  조사하여『오산시사』
                  에  기록한  오산천의  명칭  변화를  알아본다.



                  ●1481년  -성종(成宗)조에  노사신이  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용인현  산천
                  (山川)조  구흥천을  설명하면서  수원부  오산원천이란  이름이  나온다.
                  ●1611년  -광해군(光海君)  3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에
                  도  위와  동일한  오산원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753년  ;  이중환(李重煥:1690~?)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오산(鰲山)이란  지명
                  이  나오고  오산장(場)이  3일과  8일(당시엔  당연히  음력  사용)에  열린다는  기록이  나
                  온다.
                  ●1789년  -정조(正祖)  13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의  산천조에  오매(烏梅)천으로  기
                  록되어있다.
                  ●1793년  -수원부읍지에서도  오매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1800~1834년  -순조(純祖)  때에  발간된  여지도(輿地圖)에는  오천(烏川)으로  기록
                  되었다.
                  ●1831년  -순조  31년에  간행된  화성지(華城誌)에서는  오매천으로  표기되었다.
                  ●1834년  -김정호(金正浩)가  그린  청구도(靑邱圖)에서는  토범(菟汎)천으로  표기되

                  었는데  여기서  토는  예전에  오(烏)와  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835년  -위의  청구도와  마찬가지로  김정호가  쓴  청구요람(靑邱要覽)에서는  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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