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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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로 유명하며,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유서깊은 유적이다. 이번의 검토를 통해서 독
산성은 조선시대 이전의 삼국시대부터 활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독산성의 백제토기와 기와는 한성 중앙의 풍납토성 뿐만 아니라, 독산성 주변의 수청동유적,
내삼미동유적, 외삼미동유적 등 백제 유적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4~5세기대에 해당할 가능
성이 높다. 그리고 기와의 존재를 감안하면, 단순한 고지성 취락이기 보다는 군사적 성격을 갖
는 토성이나 목책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예상하게 해 주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독산성에서
남서쪽으로 8km 정도 떨어져 있는 화성 길성리토성은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화성
요리·사창리고분군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독산성 인근에는 무덤의 수가
300기가 넘는 대규모 분묘군이 분포하고 최고의 위세품 가운데 하나인 중국제 청자(동진대 청
자 반구호)를 소유한 수청동고분군이 존재한다. 그리고 독산성의 주변에는 수혈의 형태로 조성
25)
된 대규모 저장시설도 분포하는데, 이 지역은 물류의 거점으로도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정황을 고려하면, 4~5세기대 황구지천과 오산천 유역의 오산·화성지역에는 2개의
지역정치체, 즉 요리·사창리고분군을 수반하는 화성 길성리토성 집단과 수청동고분군을 수반
하는 오산 독산성 집단이 정치·군사·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길성리토성과 독산성을 중핵으로 하는 두 지역정치체의 사회구조 및 백제 중앙과의
관계는 향후의 진전된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독산성에서 확인된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토기는 진흥왕대 신라의 영역화와 관련된 유물이
다. 독산성 주변에 분포하는 6~7세기대 신라의 주거유적 및 분묘유적과 밀접하게 연계되는 것
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관방유적이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반해서, 신라는 돌을 이용한 석축산성
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독산성 발굴조사에서 이와 관련된 성벽이 확인될 가능
성은 매우 높다.
본고는 독산성에서 지표조사로 채집되었거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검토하면서 주변
유적과의 비교를 통해서 삼국시대 오산지역의 역사성을 새롭게 조망해보았다. 독산성은 조선시
대에 중요한 방어성으로 기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백제 또는 신라시기에도 군사적 요
충지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할 예정이지
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산성에 대한 향후의 발굴조사에서 백제 또는 신라와 관련된 방어시
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
25) 독산성 주변의 화성 송산동유적에서 백제의 수전이 발굴되었으며 석우리 먹실유적에서 밭이 확인된 상황도 함께 고려할 필요
가 있다.
42 이형원·강정식·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