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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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이 출토된 독산성은 동일 시점 혹은 좀 더 빠른 시점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론이 가능하

               다. 당시 오산을 포함한 한강유역, 경기도 일원은 남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와 직접적인 경계
               를 이루는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력과 방어시설 없이 취락이나 고분이 들어서지 않
               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수동 유적, 궐동 유적, 양산동 유적, 탑동·두곡동 유

               적과 같이 8~9세기 대까지 운영되는 유적의 존재를 통해 보았을 때, 독산성의 운영 시점도 가
               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향후 발굴조사에서 좀 더 많은 자료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3. 독산성 신라 유물의 고고학적 의의



                앞서 독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 신라토기를 대표할 수 있는 몇 가지 유물을 소개하였다. 신
               라가 진흥왕대 553년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한강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진행되었

               다. 그 결과 다수의 산성이 축조되었고, 6세기 후반대가 되면 정복자들의 무덤이 조영되기 시작
               한다. 따라서 신라인들이 사용한 물질문화가 한강유역에 정착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
               가 확인되는 것이 바로 토기이며, 가장 표지적인 유물은 처음 소개한 고배류이다. 대각에 투창

               이 있는 유개(뚜껑이 있는)식 단각고배류를 통해 신라인의 정착 시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그림 10-①번】 단각고배가 가장 이른 시점으로 판단되

               는데, 여주의 파사성 및 하남 이성산성,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이천 설봉·설성산성, 용인 할
               미산성 등 경기지역의 초기 신라산성에서 확인되는 유물들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신
               라가 독산성을 축조한 시점은 6세기 중~후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림 10-②·③·④·⑤번】 유물은 7세기 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예세삼각형선문+콤파스원호문이 시문된 뚜껑은 7세기 초엽 처음 등장하였다가 곧 사라지는 유

               물로 서울·경기지역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유물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7세기 대 까지도 독
               산성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0-⑥번】 유물은 연속적인 원문양이 시
               문된 인화문토기로 7세기 전반 경부터 8세기 초엽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유

               물과 더불어 2000년에 기전문화재연구원(현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진행한 독산성 시굴조사
               출토유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문이나 이를 연속적으로 찍은 연속원문이 시문된 토기편과
               더불어 작은 병의 외면에 점토띠를 세로로 붙이고 띠 사이에 점열문을 시문한 ‘주름문 병’의 저

               부 및 동체부가 확인되었다. 원문의 인화문 토기는 전술한 토기류와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는
               데, 주름문 병은 8세기 후반 경에 등장하여 9세기 중엽 경까지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된 바 있




               40  이형원·강정식·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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