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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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원동  당촌에  (당시는  수원군  청호면  당촌  또는  당말)서  태어난  심주택(沈
                  周擇:  고종4년,  1867년  4월  19일~1945년  1월  23일)이라는  분이  살았다.  호는  오
                  정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특이한  자질로  선생은  1891년(고종
                  28년)음력  2월  8일  세자궁  탄일에  치러진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과  차석으로  등과하
                  였다.  그리고  승차를  거듭하여  1906년  3월  2일  정3품  통정대부자로  승급하고  1907

                  년(광무11년)  4월  6일  시강원  시독관  서주임  3등자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니  선생
                  의  나이  41세였다.  아까운  나이였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조정에  그냥  눌러앉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일본의  내정  간섭과  합방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
                  대단하였으며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  들어오는  등  국운이  소진할  때여서  공은  미련
                  없이  약관  25세의  나이에  입궐하여  15년간의  궁중  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오산으

                  로  내려왔다.  1907년은  고종이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파하여  일
                  본의  침략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이를  트집  잡아  일본은  왕위를  둘째  아들인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시키려고  하던  때
                  였다.  하루는  공이  시강원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을  때  고종의  전교가  있어  급히
                  어전으로  나가  부복하니,  고종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옥좌에서  내려와  공의  두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의친왕  척(拓)과  영친왕  은(垠)을  잘  부탁하오.“  라고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것이  고종과  공의  마지막  대면이고  대화였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순종에게  양위  되었고,  1919년에는  결국  일인에게  독살당했다고  전
                  한다.  공이  그간  시강원에서  시독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종의  셋째  아들  은(垠)인
                  영친왕을  가르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영친왕의  나이  5세  때(1900년·광무4년)

                  부터  공이  벼슬을  사직할  때까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유지하여  왔으니,  영친왕이
                  공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렇게  하여  공이  향리인  오산  당촌으로  낙향
                  하여  향리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인  1907년(순종  원
                  년)  12월  영친왕의  나이  11세  때  일본의  볼모(대외적으로는  일본  유학)로  끌려가게
                  되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일본행에  영친왕은  경부선  기차로  부산으로  내려가다

                  오산에  살고있는  스승을  마지막으로  뵙고자  미리  기별을  하니  당시  수원군에서는
                  인력거를  보내  공을  오산역으로  모셨다.  1905년  오산역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황태
                  자가  기차를  세우고  내리니  인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영친왕은  스승
                  인  공의  손을  꼭  잡고  눈물만  흘렸으며  스승인  공  역시  나라의  힘없음을  한탄할  뿐
                  말문을  열지  못하여  안타까움만  남기고  영왕은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  후에도

                  영친왕이  조국에  다니러  오면  오고  갈  때마다  오산역에서  공을  만나고  가니  조그마
                  한  면소재지의  작은  역에  황실의  전용  열차가  정차하니,  온  면내가  소동이  일어나
                  곤  했다.  제자인  황태자와  스승의  아름다운  만남이  오산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  오원교(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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