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4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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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모르는 중국과 일본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일 밥
먹듯이 우리말을 쓰는 한국학자가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뜨렸다’거나 ‘백회를 발라 글자
를 조작하였다’고 해석하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 삼국시대 이두 향찰의 쓰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신라 향가에 수없이 등장하는 주격조사 ‘隱’과 대격조사 ‘乙’을 모욕하는 처사다.
필자는 신라 향가 서동요에 쓰인 대격조사 ‘乙’과 북위 알선동 탁발도 축문에 쓰인 여격조사
‘ ’를 근거로 광개토왕비문에 쓰인 ‘ ’의 정체를 대격조사 ‘乙’로 판단하였다.
신묘년(辛卯年, 391)에 倭를 불러들인 것은 백제 진사왕(辰斯王)이고, 바다를 건너오는 倭를
막지 않은 것은 신라 내물왕(奈勿王)이다. 이에 광개토왕은 고구려를 침략하는 백제를 깨뜨리고
동예와 신라 백성을 신민(臣民)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서기 倭 신공황후(神功皇后), 응신천황(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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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天皇) 편과 삼국사기 신라 내물왕 편에 그 사실이 자세하다.
永樂 6년(396), 고구려 광개토왕이 討한 백제 이잔 58城의 牟水城을 水原古邑城과 禿山城으
로 판단한다. 수원고읍성은 마한 모수국의 邑城이고 독산성은 모수성을 호위하는 山城이다. 지
금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의 수원고읍성과 오산시 지곶동의 독산성을 광개토왕비문의 모수성
에 비정한다.
79) 응신천황,『완역 일본서기』, 전용신著, 일지사刊, 1989, 172쪽.
192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