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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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에  2건의  기록이  보인다.
                    백제  온조왕  11년조에  “독산책과  구천책의  양책을  설비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
                  다.”  는  기록과  신라  내물이사금  18년조(백제  근초고왕  28년)에  “백제의  독산성주
                  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으므로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  기록에  보이듯이  독산은  기록상  오산  최초의  지명
                  이기도  하다.
                    남문에는  진남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독성려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전
                  하고  있다.『기전영지(畿甸營誌)』「수원도호부  고적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
                  사가  실려  있다.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은  수원도호부  남쪽  삼십  리에  위치한  독성산성에  있다.  경
                  진년(1760년)  장헌세자(사도세자)께서  온양온천  행차  시  독산성  진남루(鎭南樓)에
                  이르렀을  때,  본부중군(本府中軍)  이두환(李斗煥)에게  교시하기를  이곳에  어떤  고적
                  이  있느냐?  하니,  이두환이  대답하기를  진남루  아래  긴  산기슭에  큰  무덤(大塚)  하

                  나가  있는데,  예로부터  여왕릉(麗王陵)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이  기사의  독성려왕릉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연구된
                  설  중  여러  시대,  왕  또는  왕족을  비정하는  설  등이  있으며,  독성려왕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설  중에서  백제의  제16대  왕  진사왕  여휘
                  (餘輝)의  능으로  비정하는  설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향토사학자  임종삼은『독산성

                  2002,  오산문화원』에서  독성려왕릉의  려(麗)를  진사왕의  이름(휘)인  여휘의  여(餘)
                  로  보고,  진사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공격해오자  진
                  사왕(백제  제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제15대  침류왕의  아우이며,  침류왕  사
                  후  태자  아신이  어려  태자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대신  오름)은  싸울  생각은  않고

                  구원(지금의  부산동,  갈곶동  등지라는  설)에서  사냥만하다가  10일이  되어도  돌아오
                  지  않았다.  그해  11월  왕이  구원행궁(지금의  융·건릉  부근이라는  설)에서  갑자기  죽
                  어  아신왕(제17대왕)이  등극했다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백제  진사왕이  무례하여
                  왜왕  응신이  기각숙니,  우전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의  허물을  책망하
                  니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과하였다는『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아신의  등
                  극  과정을  아마도  아신이  정변(아신세력이  여휘를  살해하고  본래  자신의  정권을  되

                  찾음)을  일으켜  정권을  잡지  않았겠는가  하는  해석을  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한발
                  더  나아가  정권을  잡은  아신왕이  정적인  죽은  진사왕을  도성인  한성에  옮기지  않았
                  고,  독산성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설이다.  임종삼은  그래서  왕릉이  이곳  독산성  남쪽
                  에  있게  됐으며,  진사왕릉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독산성  남쪽  통봉에  비정까지  한다.

                  임종삼은  『독산성2002,  오산문화원』에서  이  설을  제기할  때  통봉의  발굴을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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