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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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충신정려문(李商載忠臣旌閭門)
이상재충신정려문은 오산시 서동 산 60-1에 소재한다. 오산시향토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 있다. 연대는 1815년(순조 15년)이며, 정판과 정려기가 보관되어 있는 맞배지붕의
정려각 1채로 되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구조이며, 우측칸 상부에 이상재충신정려문 정판이 있고 그 아래에
송면재(宋冕載 1764~?)가 지은 정려기 현판 1좌가 있다. 내부 좌, 우측면에 각각 백호, 청
룡이 그려져 있으며 정문은 홍살문으로 되어있다.
정려각 좌측에 협간을 두어 선생의 신위를 모신 감실을 마련하였으며 감실 입구는 판
장문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며, 겹처마로 백골집(단청
을 하지 않고 칠도 하지 않은 집)에 좌우에 방풍판이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의 건축물로 판단된다. 정려가 내려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숙종 33년(1707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짐
• 영조 17년(1741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가 증직되면서 정판이 내려짐
- ‘忠臣 贈 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行通德郞金井
察訪 兼 承文院著作 李尙載之門 崇禎紀元再甲 辛酉 特命加贈(충신 증 통정대부 홍
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행통덕랑금정찰방 겸 승문원저작
이상재지문 숭정기원재갑 신유 특명가증)’이라 쓰여 있음
• 정려각은 순조 15년(1815년)에 오산시 서동 산 60-1번지에 세워졌다.
이상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
동 출생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며, 옥(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정랑을 지낸 계록(繼祿)
이고, 아버지는 광해군과 동서지간이 되는 군수 덕일(德一)이며, 어머니는 유자신(柳自新)의 딸이
다. 사복시 첨정 이인후의 딸을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1630년(인조 8년) 사마시에 합격하
여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
에 올랐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중국의 사신 학사 강왈광(姜曰廣)이 크게 존경하여 시문을
받아 갔는데, 이 시가『황화집(皇華集)』-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使)
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에 실려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1636년(인조 14년)
에 금정도찰방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
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란한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진군하다 용인의 험천(險川: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분전했으나 전사하였다. 사후에 홍문관 교리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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