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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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읍동(樓邑洞)의 지명유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땅에도 이름이 있는데, 우리는 지명이라 한다. 이 지
명에는 그 지역의 정서와 특징을 담고 있다. 필자는 오산시의 여러 지명 중에서 특
히 누읍동의 지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누읍동의 지명유래에는 마을의 지형이 와
우형(臥牛形)이라는데서 ‘누운 소’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누운소 > 누은소 >
누음소 > 누음새 > 누읍새 > 눕새로 구전되면서 눕새골(누읍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먼저 지명의 글자 해석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본다. 樓邑洞(누읍동)의 글자를 그대로 해석한다면 읍치가 있던 동이라는 뜻이다.
읍치는 현재의 관공서, 즉 행정치소가 있던 곳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누읍(樓邑)이 있던 곳이다.
예로부터 읍치가 되려면 보편적으로 세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첫
째가 행정관아, 둘째가 서당 또는 서원이요, 그리고 셋째가 행궁이다. 이 세 조건은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읍동이 이 세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현재 이 세 가지 중에서 눈으로 실제 볼 수 있는 곳은 서원(서당)으로 누읍동 인근
궐동의 오산화성궐리사이다. 정조가 칙명으로 사액하기 전에는 공서린이 세운 서원
(서당)이었다. 읍루는 누읍동의 지명에 포함되어 있으며, 즉 현재의 누읍동이며, 행
궁은 궐동의 궁(宮)터이다. 이 궁터는 예전에 궁(宮)터가 있어 붙여졌다는 설과 마
을의 생김새가 활의 모양인 궁(弓)처럼 생긴데서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는 있으
나, 1899년(광무 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초평리 궁기리(宮基里)가
나오고,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초평면의 궁대(宮垈)
등의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행궁이 있었던 마을로 본다. 누읍동은 읍
치가 있었던 곳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필자가 지명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추론한 것이다. 이 필자의 가설은 언젠가 기록물이 발견되어 확인 가능한 설이 되
리라 본다. 오산시의 법정동 24동은 비록 동으로 나뉘어 있으나, 동의 면적이 적어
인근동끼리 묶어도 한 묶음 동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작다. 누읍동 서편 뒤에
탑동이 있다. 탑동에는 지금은 없어졌다는 읍탑이 있었으며, 이 읍탑을 돌며 구복의
탑돌이 하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마을의 탑돌이를 하던 읍탑은 행정관아가 있는
읍치 중심에 설치하기에 누읍동이 읍치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더하는 증거가 된
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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