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0 - 오산학 연구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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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인청 춤꾼 이동안



                 이동안은 재인청과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의
               전통춤과 재인청 춤을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동안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아버지 이재학(李在學)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재학은 경기재인청(이동안과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화성재인청으로 많이 나오나 경기재인청으로 표기함) 소속 재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 또한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이동
               안은 12세에 남사당 광대 김석철을 따라 가출해 황해도 황주에서 새미(무동) 노릇을 하며 임종

               성에게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으나 아버지에게 집으로 잡혀와 임상문과 줄타기를 한다. 14세
               이던 1920년 두 살 위 연화와 혼인을 하나 장가든 지 사흘 만에 무작정 상경해 용산의 한 담뱃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던 중 황해도에서의 줄타기를 본 사람이 알아보고 광무대

               로 데려갔다고 한다. 1930년 5월 광무대가 불타 소실될 때까지 과천 김관보(金官甫)에게 줄타
               기를, 이날치의 제자 김인호(金仁浩)에게 춤을 배우고, 발탈의 명인 박춘재(예명 朴八封), 남도
               잡가 소리꾼 조진영, 새납(태평소)의 명인 방태진, 대금과 피리·해금의 명인 장점보 등을 스

               승으로 모셨다. 1929년 대동가무단을 조직해 임방울·이화중선과 만주·중국·러시아 공연을
               가기도 했다. 1937년 12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한성준(韓成俊)의 부탁으로 춤을 가르쳤

               는데 이때 최승희에게 승무·장고무·태평무·진쇠춤 등을 가르쳤다 한다. 1948년 대한국악
               음악무용전문학원을 설립하고 김백봉을 제자로 맞기도 했다. 1952년 유기룡·박헌봉·박석희
               등과 함께 대한국악원 창립위원이 된다. 1981년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 뉴욕 카네기홀에서

               하보경·공옥진·이매방과 공연을 한다. 1983년 6월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
               로 지정된다. 1995년 6월 20일 90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동안의 생애는 우리나라 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재인청 재인인 김인호에게 배운 춤 종류
               만도 30가지가 넘는다 한다. 그러나 이동안은 춤이 아닌 발탈로 예능보유자가 된다. “내가 안

               하면 끊긴다고 해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이 아니야”
               라던 이동안은 끝까지 ‘전통춤의 산증인’으로 불리길 원했다고 한다. 이동안은 평생 많은 제자
               들을 배출한다. 선생의 제자들을 면면이 살펴보면 최승희·김백봉·장월중선·김백초·최경

               애·김덕명·김진홍·최현·문일지·배정혜·정승희·신순심·오은희·정경파 등 보기에도
               쟁쟁하다. 이외에 김명수·이승희·윤미라·정주미·박경숙·안효순·박윤경·박정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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